인도네시아 드림을 좇아서
한국 여성이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한국 여성이 인도네시아에 오는 경우는 거의 언제나 피부양 배우자로서이며, 남편은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1,800개 한국 기업 중 한 곳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약 6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으며, 이는 외국인 커뮤니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많은 동포들과 달리 Mee Kim은 고국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그는 템포(Tempo)에 “여자라는 이유로 그곳에서는 스스로 성장할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그의 고향은 인도네시아다. 이곳은 그의 다국적 기업 CEO SUITE GROUP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이 회사는 자카르타,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방콕, 마닐라, 베이징, 상하이, 서울에서 2,000개 국제 기업에 사무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김 대표는 시간을 내어 템포 기고가 Seulki Lee와 인터뷰를 가졌고,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겪은 시련과 고난을 들려주었다.
주요 내용:
처음에 인도네시아에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4년 전, 시드니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뒤 호주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호주에 있었습니다. 회사는 저를 국가 매니저로 임명해 방콕 사무소를 맡겼습니다. 2년 후에는 이곳에 새 지점을 열라며 저를 자카르타로 보냈습니다. 당시 자카르타는 활기가 넘쳤고, 교통 체증과 공해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에너지와 사람들에게 반했습니다.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잠재 고객들이 줄을 섰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 나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행정 지원과 함께 임시 사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1997년 저는 회사를 떠나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 타워2에 제 서비스드 오피스를 열었습니다.
한국 여성으로서 어떻게 한국 밖으로 나가 일할 용기를 냈나?
1985년 당시 한국의 구인 광고에는 지원자가 병역을 마쳐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남성만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죠. 한국 기업에서 여성에게 열린 일자리는 비서직이나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으로 매우 제한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계 회사나 은행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첫 직장은 씨티은행이었습니다. 매일이 악몽이었고, 저는 숫자에 밝은 사람이 아니어서 부서에서 실적이 가장 나빴습니다. 상사는 제가 결혼해서 조용히 그만두도록 누군가와 맺어주려고까지 했습니다.
1998년 한국에서는 해외에 나가려 해도 여권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호주에 대해 거의 몰랐고 호주에 있는 한국 유학생도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호주는 아르바이트 기회가 많았고 졸업생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었죠. 그래서 씨티은행을 그만두고 시드니의 석사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들이 매우 보수적인 부산 출신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해외에 나가 혼자 사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머니께만 말씀드리고 모든 준비를 혼자 했습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떠났습니다. 그렇게 제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오피스 서비스’ 사업에는 어떻게 처음 발을 들이게 됐나?
시드니에 있을 때 시간제 통역사로 일했지만 수입이 충분하지 않아서 원룸 아파트를 빌려 구세군에서 얻은 중고 가구로 꾸몄습니다. 하나뿐인 침실은 태국인 친구에게 전대하고 저는 거실에서 소파 베드를 쓰며 지냈습니다. 제가 집을 청소하고 친구에게 요리를 해주면 친구는 매달 돈을 냈습니다. 그걸로 생활비와 집세를 충당했죠. 그렇게 버텼습니다. 마치 제 첫 창업 같았습니다.
학업을 마쳤을 때도 취업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수백 통의 이력서를 보낸 끝에, 당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서비스드 오피스 사업을 하는 호주의 중견 기업에 겨우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업에 단번에 매료됐습니다. 어쩐지 제가 아파트를 빌려 친구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던 방식과 매우 비슷했거든요.
CEO SUITE가 매년 30~40%씩 성장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했나?
이전의 호주 회사와 다른 경쟁사들을 이기려면 상당히 큰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저축을 모두 털어 넣었고, 남편의 집과 아버지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첫 센터는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 타워2에 열었습니다. 같은 건물에는 거의 같은 규모인 1,500제곱미터 공간에 가장 큰 한식당을 연 한국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자카르타에 사는 많은 한국인들은 그와 저 중 누가 먼저 망할지 내기를 했습니다. 한 달 뒤 IMF와 함께 최대의 아시아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많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철수했습니다. 제 은행 대출은 전액 미국 달러였는데, 환율이 처음보다 20배나 요동쳤습니다. 그 한식당은 1년 안에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임신을 했고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졌습니다. 폭동, 화재, 성폭행, 그리고 개혁. 마치 전쟁터 같았고, 제 이전 회사를 포함해 대부분의 외국인 투자자들이 떠났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제게 기회가 됐습니다. 절박한 마음에, 너무 두려워 자카르타에 머물지 못하는 외국인 고객들을 대신 관리해 주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저희는 서비스드 오피스, 인터넷, 회의실 같은 기존 시설에 더해 원스톱 지원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고객들은 본사에 편안히 앉아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저희에게 이메일 한 통이나 전화 한 번이면 충분했습니다.
저희는 고객을 대신해 세금 신고를 하고, 고객의 거래처를 응대하고, 필요한 회의에 참석하고, 직원을 관리하고, 급여를 처리하는 등 인도네시아 사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고객들은 대개 한 달에 한 번쯤 와서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갔습니다. 당시 수요가 엄청났고 사업은 잘됐습니다. 첫 센터를 연 지 2년도 안 돼 두 번째 지점(Wisma GKBI)을 열었습니다. 최근에는 AXA 메가 쿠닝안 시티에 14번째 센터를 열었습니다. 다른 센터들은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방콕, 마닐라, 상하이, 베이징, 서울 등 아시아 7개 도시에 있습니다. 저희는 빠르게 성장해 왔으며 주로 다국적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업계에서 10~20년의 경력을 쌓은 여성 전문가 팀을 보유한 유일한 서비스드 오피스 그룹입니다.
그렇다면 CEO SUITE 직원의 90%가 여성이다. 여성 채용에 한계는 없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권력은 남성에게 있고,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이라면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겁니다. 게임에서 제 권력을 유지하려 하겠죠. 우리(여성) 각자가 서로를 돕는다면 결국 그날은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여성에게 주어진 과제는 결혼과 육아, 그리고 커리어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였습니다.

인상 깊었던 인도네시아 여성 경영인 세 명을 꼽는다면?
Shinta Kamdani(Sintesa Group 대표이사)는 사업 외에도 정치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저는 그녀를 슈퍼우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CSR 활동도 많이 합니다. 저희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소규모 사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교육과 자금을 지원하는 엔젤 펀드(Angel Fund)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Femina Group 출판사를 이끄는 Svida Alisjahbanana가 있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이며 뛰어난 사업가입니다. 블루버드 그룹(Blue Bird Group)의 부사장 Noni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슈퍼우먼이 많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해내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아직 가사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여성이 모든 것을 직접 챙겨야 하니까요. 다들 제게 다음엔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데, 저는 인도네시아라고 답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았습니다. 저에게는 인도네시아 드림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큰일을 이뤄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입니다.













